2013년 1월 4일 부터 14박 15일 안나푸르나를 다녀 왔다.

에베레스트를 다녀온지 딱 9년만이다.

 

그때의 에베레스트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때 가장 가슴에 남는것 하나가 어린 포터들의 모습이다

루쿠라로 들어오는 여행객을 기다리는 그들의 삶은 절박하였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려 포터를 정하니 그들의 나이드 대개 16세 전후였다.

그 아이들은 우리를 만나자 잠시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우리와 계약이 성사된후에야 그 아이들은 비로소 한끼의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트래킹을 떠날때 나름 짐을 잘싼다고 많은 짐을 압축하여 작게 카고백을 꾸렸다

적어도 30Kg 가까이 되었으리라.

아침겸 점심을 먹고온 아이들을 보고 많은 미안함이 가슴속에 차오는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아이들은 일(?)을 맏지 못하면 거의 굶다 싶이 지낸다고 하였다.

트래킹 중간에도 그 아이들은 우리와 거의 마주치는일 없이 앞질러 나갔다

다운침낭에 따또바니(더운물) 품고 자는 우리도 추위에 떨며 밤이 무섭다고 하였는데 그 아이들은 난방불 꺼진 식당 긴의자에서 담요한장으로 그밤을 보냈다

맨발로(다는 아니지만) ...

아직도 우리보다 앞서가 산 중간 중간에 따뜻한 양지에 풀줄기 입에 물고 누워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던 그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 눈에 어른거린다

 

안나푸르나 트래킹은 에베레스트보다 기후, 환경등은 훨씬 좋다.

식수와 주변 수목이 야크똥을 말려 연료로 사용해야하는 에베레스트의 삭막한 풍경과는 완현히 다르다.

(시누와 이후는 나무를 연료로 사용할수없어 밤에 춥기는 거의 비슷하지만)

또한 포터들의 짐의 무게도 20Kg 이내로 제한을 두고 있어 예전의 카고백과는 완전히 다르다.

확실히 에베레스트때 보다는 여유롭다.

 

국가의 혼란으로 예전의 네팔이 아니다.

제1의 수도인 카트만두 조차 급수와 전기의 제한조치로 어두는 도시로 변해있으니 주변 도시, 산골마을은 오죽할것인가 ?

기반시설과 생산시설이 거의 전무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할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사람이 넘치는 나라

그런 가운데서도 산속의 그들은 미소를 잃지 않고 살고 있다.

마음의 여유는 우리보다 많아 보인다.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 하루 우리와 걷던 그 아이들도 언제나 눈 마주치면 웃음을 건넨다

우리는 풍요를 누리면서도 불편함과 불만이 많은데...

 

힘들게 시누와에 어스름한 저녁에 도착하여 쉬며,  이제 이틀후면 베이스캠프까지 갈 수 있다는 희망과 아직 이틀을 더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할때 베이스 캠프에서 내려오는 한국 여성 트래커 두명을 만났다

그들은 생기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우리가 이틀을 걸어 올라가야할 길을 단 하루만에 하산하였는데도 피곤한 기색없이......

생각하여본다.

엄청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생기가 넘칠까 ?

안나푸르나베이스 캠프를 갔다 왔다는 자신감일까 ?

아니면 또 다른 여행을 목표로 두어서일까 ?

내려오면서 깨달았다...

성취의 기쁨 ?

꼭 올라간다는 욕망이 나를 얽메고 있던 마음으로 부터의 해방의 기쁨 ?

나에대한 자신감 ?

아니다...

그것은 내려간다는 기쁨이었다.

내려간다는 그 자체가 기쁨이었다.

편안함이 있는 곳으로 ...

 

다시 생각해본다...

나는 왜 그런 곳을 떠나왔어야만 할까 ?

무엇을 찾아 왔을까 ?

언제가 끝일까  ?

시누와에서 만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일본여성이 생각난다.

혼자 이곳을 찾았다.

도쿄에서 가드너(정원설계 비슷한일을 하는것으로보임)가 직업이라는 이 여성은 다음 목적지를 상해로 정하고 있었다.

대도시가 싫어서 떠났다는 이 여성...

핫백하나 얻음에도 그렇게 기뻐하던 ...

대도시에서의 탈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부터 떠나고 싶음 .. ..

블로그 대문에 써놓은 "Because, It is ther" 도 답은 아닌것 같다.

아니면 자연의 한 부분이었던 나의 위치를 찾고 싶어서가 아닐까하는 우답을 생각해본다.

 

묻고싶다.

안나푸르나 찬 눈속에 누워있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왜 그곳에 누워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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